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 (문단 편집) ==== 올로스 복합체 ==== ||[[파일:1280px-OljeituToPhilippeLeBel1305.jpg|width=100%]]|| || 1305년, [[일 칸국]]의 올제이투 칸이 동맹이었던 [[프랑스 왕국]] 국왕 [[필리프 4세]]에게 보낸 외교 서신. [[카이두 칸]]이 일으킨 내전이 진압되어 남중국에서부터 지중해까지 전 몽골령이 다시 통일되고 [[실크로드]]가 정상화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편지에서 올제이투는 스스로와 필리프 4세를 이슬람식 군주 칭호인 [[술탄]]으로 부르고 있으나 막상 문서는 제국 공용어인 [[몽골어]]로 작성되어 있으며, 배경에는 [[한문]]으로 쓰여진 몽골 대칸 [[성종(원)|성종]]의 [[옥새]]가 찍혀 있다. 원본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흔히 몽골 제국이 1260년을 기점으로 '분열'되었다는 방향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칭기즈 칸이 건설한 몽골 제국은 '''처음부터''' 여러 올로스로 이루어진 복합체였으며, 각각의 올로스는 여러 유목민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올로스를 지배하는건 칭기즈 칸의 일족인 [[카간]] 일족이었다. 이 단계에서는 농경 지역을 정복하고 정주민들을 지배하지는 않았다. 그 후 전쟁이 확대되고 정주지대가 몽골 제국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자 카간은 정복의 성과를 일족에게 나누어 공동으로 향유한다는 정신에 따라 이를 일족들에게 분배하였다. 하지만 정주지대의 주민들을 관할하고 그들에게 징세하는 건 카간의 독점적인 권한이었다. 즉 정주지대는 카간의 직할령이었다. 정주지대는 올로스의 칸의 관할권에 속해있지 않았기에 칸들은 카간의 재정수입 가운데 자신의 몫을 건네받았다. 이를 통해 '''유목민들은 칭기즈 칸 일족이 지배하는 여러 올로스로 나누어졌지만 농경민족들은 카간의 일원적인 지배하'''에 놓였다. 그것은 '''다수의 올로스라는 분권적 측면과 농경지대에 대한 단일지배라는 중앙집권이 공존'''하는 지배형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농경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카간과 각 올로스 지배자 사이에서 갈등을 빚었다. 올로스 지배자들은 직접 농경지대를 관할하기를 바랐고 이런 경향은 시대가 지날수록 강해졌다. [[몽케 칸]] 사후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를 두고 벌어진 갈등은 그런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쿠데타로 집권한 [[쿠빌라이 칸]]은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기에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자 카간의 고유권한이었던 정주지대에 대한 관할권 위임을 약속했다. 이를 통해 몽골 제국은 유목민과 농경민을 동시에 장악하고 지배하는 여러 올로스로 나누어졌다. 아울러 실권이 약화된 카간에 대한 정치적인 독자성도 강화되었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의 통치 이후에도 大 몽골 올로스는 변함없이 여러 올로스의 복합체였고 4대 올로스 이외에도 다른 올로스들이 다소 분포하고 있었다. 쿠빌라이 칸의 직할령인 대원大元 올로스보다 동쪽에 있던 칭기즈 칸 동생 일족인 동방 3왕가는 1287년 반란을 겪기 전까지 직할령이 아니었다. 또한 유라시아 서부 초원에는 [[주치]]의 여러 후손들이 지배하던 올로스가 있었고 [[킵차크 칸국]]은 그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중앙아시아에도 [[차가타이]]와 [[오고타이]]의 후손이 지배하는 여러 올로스가 있었다. '''따라서 단일 제국이 1260년을 기점으로 4개로 분열되었다는 것은 실제 사실과 전혀 다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